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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인물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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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李康秊 1858~1908) 상세보기 - 제목,작성자,작성일,조회수,첨부파일,내용 정보 제공
제목 이강년(李康秊 1858~1908)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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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운강(雲岡,雲崗)자는 낙인(樂仁,樂寅)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1879년 3월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개화정책에 불만을 느끼고 낙향하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이어지자 고향에서 창의하여 안동관찰사 김석중을 죽여 기세를 떨쳤으나, 곧 패하고 제천의 호좌의진으로 돌아와 유격장이 되었다. 이후 이강년은 덕산의 동창과 조령 일대를 주된 활동무대로 하여 일본군 병참을 공격하고, 한편으로는 영남에서 활동중인 서상렬 부대를 엄호하였다. 후에 제천의병이 장기렴의 관군에게 위협받게 되자 청풍쪽을 방어하였다. 그러나 제천을 빼앗긴 후로 서북쪽을 향하는 본진을 따르지 못하고 소백산에 들어가 해산하였다.

이듬해 요동으로 가서 유인석을 좇았고, 단양 금채동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부모를 봉양하였다. 동문들이 화서집을 간행할 때에도 적극 주선하였다. 1905년에 원용팔이 봉기하였을 때는 신병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곧 재기하여 1907년에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즈음하여 윤기영 등과 함께 의병을 크게 일으켰다. 먼저 제천으로 몰려든 여러 의진과 함께 제천의 천남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으며, 이후 호좌의진을 재건하여 대장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이강년의 의병활동은 후기의병전의 특징이기도 한 유격전의 양상을 띠었다. 가평, 싸리재, 영월. 죽령 등 소백산지대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그의 활약은 험준한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적의 약점을 공격하는 전투의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해 말로 접어들면서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고, 탄환의 공급이 달리게 되면서 이강년의진은 공경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복상골전투에서 많은 장졸이 체포되고 전사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후로는 의진을 급속히 북쪽으로 옮겨 가평 화악산 일대로 이동하였다. 이인영이 주도하는 서울진공 작전에 부응하는 면이 없지 않았지만, 겨울을 무사히 넘기기 위한 것이었다. 가평 일대에서 겨울을 넘기고 난 이강년은 이듬해 봄 그 곳을 떠나 영동지역을 거쳐 다시 제천 일대로 내려왔다. 이후 경북 북부지역인 서벽, 재산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으나, 의진의 세력이 날로 떨어졌다. 결국 그 해 7월 2일의 작성산전투에서 부상으로 체포되어 10월 13일에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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