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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인물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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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태(金尙台 1862~1912) 상세보기 - 제목,작성자,작성일,조회수,첨부파일,내용 정보 제공
제목 김상태(金尙台 1862~1912)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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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김상호(金尙鎬)이며, 자는 경륙(景六), 호는 백우(白愚)이고 본관은 삼척이다. 장성하여 영월의 옥동으로 이주하였는데, 을미의병 때부터 이강년과 함께 활동했고, 호좌의진이 북상한 이후 유인석을 좇아 3년간 가르침을 받았으며, 백두산 주변과 무송. 임강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귀국하여 남천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김상태는 1905년 정운경의 봉기에도 참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7년의 고종퇴위와 군대해산에 즈음하여 원주진위대가 봉기하자 그 무기를 얻고, 사군의 병력을 모아 이강년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 자신 중군이 되어 의병전쟁에 투신하였다. 이후 김상태는 갈평. 영월. 죽령전투 등에서 지휘하여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 해 말에 복상골전투에서 패전한 이래 본진과 분리되었다. 이강년이 북상한 동안 남쪽에 남았다가, 이듬해 이강년의 본진과 분리되어 소백산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이강년이 체포된 후에는 호좌의진을 재건하여 1912년 여름에 이르기까지 태백. 소백산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친일분자를 처단하고 일본군을 공격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김상태는 결국 1912년 여름에 그 자신의 종사였다가 일제의 회유에 넘어간 우정응 등에게 속아 순홍군 석천포(풍기군 단산면 광암리)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징역 3년형을 선고 받은 김상태는 대구형무소에 이감되자 아들 원기(源基)에게 '두학 장치미에 있는 이강년의 무덤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단식한 지 13일 만에 순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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