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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인물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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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규(白南珪 1884~1970) 상세보기 - 제목,작성자,작성일,조회수,첨부파일,내용 정보 제공
제목 백남규(白南珪 1884~1970)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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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운암(雲庵), 본관은 수원이다. 충주의 금가면 월상리에서 농부인 낙성(樂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운센 장사였던 그는 17세 때에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의 길을 걸었다. 안동분견대의 부위(副尉)로 있다가 부대를 이탈하여 의병봉기를 도모하고 있던 이강년에게 의탁하여 의병에 투신하였다. 이후 1907년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 등으로 촉발된 정미의병기에 백남규는 이강년 부대의 우선봉, 또는 도선봉으로서 천남. 갈평.영월.싸리재전투 등에서 용맹을 떨쳤다. 그는 신식 군사교육을 받은 핵심 간부의 하나로서 중요한 전투마다 활약을 하였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항상 육혈포를 지니고 있으면서 사살한 일본군의 귀를 잘라 꿰어 말에 달고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해 말 일본군의 집요한 공세에 밀려 이강년 부대가 복상골전투에서 치명적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 후, 본진은 북상하게 되었는데, 백남규는 여기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대신 남쪽에 남아 영남과 호서 사이에서 병력을 모았고, 이듬해 봄에 다시 남하한 이강년의 본진과 합쳐 서벽.재산지구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강년이 일본군에 체포된 후, 백남규는 일정한 병력을 이끌고 독자적인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1909년 12월에 일제에 체포되어 10년형을 받고 8년간에 걸친 옥살이를 하였다. 특사로 풀려난 후, 단양 일대에서 재기를 도모하다가 여의치 않자 중국의 상해로 가려고 하다가 1917년 2월에 음성 개회실에서 재차 피검되었고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형으로 감형되었으며. 이후 15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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