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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인물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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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일(權用佾 1884~1971) 상세보기 - 제목,작성자,작성일,조회수,첨부파일,내용 정보 제공
제목 권용일(權用佾 1884~1971)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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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경로(敬魯), 호는 청은(淸隱), 본관은 안동이다. 제천의 한수면 덕곡리 딱박골에서 농부인 태인(泰仁)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세가 되던 해에 마을 이장일을 보았는데 청풍의 일본군 헌병 주재소에서 할당하는 마초(馬草)의 감면을 요구하다가 질책을 받자 헌병들을 구타하고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 이후 행상을 하다가 해산 후, 의병을 일으킨 이강년을 만나 의진에 투신하게 되었으며, 천남전투 이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주로 우군장 이중봉의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그는 의병 봉기 당시에 원주진위대에서 얻어 배향산에 숨겨둔 탄약을 의진에 성공적으로 공급하는데 공을 세워 의진이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공로를 세웠다.

그러나 12월의 영춘 복상골전투에서 패한 후, 이강년이 주력을 이끌고 북상할 때에 권용일은 동참하지 못하였다. 그 대신 백남규 등과 함께 이듬해 봄까지 소백산 일대에서 항전을 계속하였으며, 이강년이 다시 남하하자 병력을 합쳐 경북 북부지역이 서벽, 재산 등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강년이 체포된 후에는 상경하여 재판중이던 이강년을 시중들었다. 이후 이 지역 의병의 기세가 크게 꺾이자, 수배를 피하여 은둔하였다. 후에 전 승지 김규흥(金圭興)과 이범구(李範九), 김규철(金奎喆)등과 함께 중국의 원세개에게 보내는 고종의 편지를 가지고 출국하다가 도중에 발각되어 동지들이 체포되자 정경로(鄭敬老)라는 가명에 산삼 상인으로 가장하여 인천에서 소금 배를 타고 중국 망명길로 올랐다. 이후 이국 땅에서 유랑생활을 하던 권용일은 상해에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이에 가담하여, 7년 동안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운동가 사이에 연락책을 맡았다. 후에 몰래 귀국하여 고난의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충주에 살고 있던 옛 동지 백남규와 왕래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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