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의병 인물약전

인쇄
주용규(朱庸奎, 1845~1896) 상세보기 - 제목,작성자,작성일,조회수,첨부파일,내용 정보 제공
제목 주용규(朱庸奎, 1845~1896)
작성자 의병전시관
조회수 1741
첨부파일
주용규(朱庸奎)[1845~1896]는 1845년(헌종 11) 함흥에서 출생하였으며,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이다. 스승이 장담으로 이주하자 가산을 정리하여 제천으로 이주하여 장담의 선비들을 이끌었다. 단발령이 내려진 이후 의병을 일으킬 것인가, 망명을 할 것인가, 자결을 할 것인가를 두고 처신을 정할 때 유인석(柳麟錫)과 함께 중국에 망명하여 도를 지키는 쪽을 선택하였다가, 서상렬(徐相烈)·안승우(安承禹) 등 동문 후배들이 지평에서 달려온 포군 부대를 맞아 의병에 참여하게 되자 동참하였다.

1896년(고종 33) 1월 이필희(李弼熙)를 대장으로 하는 의병 부대는 단양의 장회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붕괴될 위기에 처하자, 다음 달 유인석(柳麟錫)을 대장으로 다시 추대하게 되었다. 주용규는 호좌의진이라는 이름의 의병 부대가 정식으로 건설되자 대장 유인석의 참모 겸 의진의 군사(軍師)로서 활동하였다. 봉기 초기에 나온 여러 격문은 하나같이 그가 지은 것인데, 읽는 사람마다 주먹을 불끈 쥐고 분발하도록 하는 명문이라는 평을 받았다.

같은 해 2월 호좌의진이 단양군수와 청풍군수 등 친일 관료들을 처단하고 충주성으로 달려가 관찰사를 베고 성을 장악하자 일본군은 성을 도로 빼앗기 위해 집요하게 공세를 퍼부었다. 이때 주용규는 “우리의 도가 보존되고 없어지는 것과 국가의 흥하고 망하는 것이 이 한 번의 거사에 있다”라면서 손수 창을 들고 여러 선비와 함께 남문의 누각에 올라 전투를 독려하다가 유탄에 맞아 순절하였다. 그의 아들 주현구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유인석을 좇아 만주까지 가서 애쓰다가 세상을 떠났고, 주현삼은 정미 의병 때 이강년(李康秊)의 종사관으로 종군하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순국하였다.

담당자정보

부서
문화예술과
전화번호
043-641-5518